얼마 전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선배, 누구 알죠? 어때요?" "뭐 괜찮지. 근데 남자친구 있어" 라는 나의 말에 그는 "아니 그건 아는데.. 학교에서 만났는데 나하고 눈이 마주쳤는데 계속 쳐다보더라구요. 옆에 남자친구가 있는데. 그래서 그냥 지나쳤다가 뒤로 또 돌아보니까 또 나를 보고 있는거에요" "그래서?" "한 번 말걸어 볼까 하고요" 도시락 싸갖고 다니며 말리려다가 경험을 해봐야 깨닫겠거니, 하는 마음에 관두었다. 남자들이란 하여튼.
어쨌든, 간만에 흥미로운 영화 한편을 봤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보는 내내 어디서 한번쯤 봤던 이들의 연속적인 출연에 멍하게 입벌리고 정신없이 보다보니 약간 개운하지 않은, 회색 양복 바지 입고 소변 보고 나왔는데 바지 자크 주변에 알알이 박혀있는 수분의 흔적을 봤을 때의 기분이랄까 뭐 하여튼, 그런 느낌이었다. '그' 만 당신에게 반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녀' 역시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들 역시 영화의 내용과 같은 착각, 혹은 상상을 하기도 하겠지만 이런 착각을 누구보다 많이 하는 이들은 아마 '남성' 들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하도 떡두꺼비 같은 아들, 잘생긴 아들 소리를 듣고 자라온 대한민국의 남성들은 누구라도 지나가는 쇼윈도에 비쳐 아른거리는 자신의 옆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샘솟는 '괜찮군' 하는 자신감에 만족스러워 한다.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여성들과의 눈마주침에 '어라, 나한테 관심있나' 라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김연아가 튀어나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해대기도 하고 주변 여성들의 살가움에 '혹시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라며 아무 근거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한다. 대체 남성들이 왜 그러는지, 아직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런 그녀들의 99.9%는 '그' 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8년 살아오면서 많은 여성 친구들과 인터뷰(!)를 해 온 결과 '그' 들의 착각이 다소 심각함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고등학교 3학년 쯤 이 사실을 깨달은 나는 내 자신이 굉장한 행운아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경험을 안겨준 여성들에게 일단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프다. 덕분에, 세상 사는 것이 조금 편해졌다. 낄낄낄.
길게 쓰고 싶다만 글재주가 없는지라, 간결히 요약하면,
소개팅에서 만난 그녀가 답문자가 늦게 오는가? 그럼 또 끼리끼리 모여서 "그 애는 분명 초시계 옆에 두고 답문자 언제 보낼지 기록하고 있을거야. 밀고 당기는 거라고" 라는 주변 친구들의 말에 혹하지 말라. 당신의 문자를 받고 초시계를 쳐다보기는 커녕 '누구야' 라고 묻는 그녀의 친구에게 '신경꺼' 라고 말하고 있을게다. 당신에게 관심이 없는거다. 평소 주변에 있던 한 여성이 자신에게 너무 친근감을 표시하고 단 둘이 데이트 하자는 말에도 휑 하니 따라나섰다고 해서 그녀가 당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럴경우엔 같이 있는 또 다른 남성들에게도 그녀가 자신과 똑같이 대하는지 꼼꼼히 따져본 뒤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하라. 여성들은, 어장관리를 굉장히 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길거리에서 여자들이 자신을 쳐다보면 '내가 괜찮긴 해' 라는 생각을 행여나 하는가. 일단 거울부터 보고 얼굴에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 강남역에서 칠보 쫄바지를 입고 활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먼저 따져보기 바란다. 그리고 눈뜨고 다니다 보면 무수히 마주치는 것이 사람 눈이다. 부디, 여성들의 어장관리(!)에 슬퍼하는 많은 남성들의 신음소리와 착각 속에서 즐겁게 비명 지르며 헛된 공상을 펼치는 남성들의 수가 조금은 줄어들길 바란다. 연애하기 어려운 세상(누구 맘대로), 헛된 시간을 조금이나마 버리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