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길 몰라요

방바닥 2010. 2. 26. 23:47

 이번 달 들어서 9시 퇴근이 잦아졌다. 9시 퇴근이라고 해 봤자 8시쯤 슬쩍 나와서 퇴근 버스가 줄지어 기다리는 정문 게스트룸에 앉아 50여분 동안 책과 신문을 비비적대니 정확히 말하면 8시 퇴근이다. 점심 저녁 두 시간 제외하고 아침 8시부터 10시간 근무. 주 50시간 근무. 여기서 수요일에는 5시 퇴근하니 -3시간, 금요일도 자주 5시에 퇴근하니 -3시간. 하면 정확히 44시간. 실제 대한민국의 주당 노동시간이 44시간이라는데(OECD국가 중 자랑스런 1위) 노동생산성은 30개국 중 22위라는 것이 참으로 멋지다. 일본은 주당 34시간, 미국은 35시간, 네덜란드나 독일은 27시간이라는데. 그러고 보니, 그나마 우리 회사 정도 되니까(대리까지는 조합원 소속!) 실제 주당 44시간 일하는 거지 과장급 이상 직원들의 노동시간은 무서울 정도다. 월~금요일 내내 9시. 점심, 저녁 시간 빼고 하루 11시간 근무. 수요일에는 한 시간 빨리 퇴근하니 10시간에 토요일 오전 근무까지 하니 3시간 추가. 주당 57시간 정도 근무하는 건데 이것도 그나마 다른 회사에 비하면 나은편에 속한다. 삼성이나 엘지 다니는 친구들이 들으면 지랄지랄할거다 아마.
 아, 이 말 하려고 쓴게 아니었다. 싹뚝, 잘라서.

 9시 퇴근 버스에 타면 술 냄새가 간간히 풍겨온다. 회식을 마치고 퇴근 버스에 오른 직원들이 내뿜는 알콜 향인데 얼마 전에는 한 여사원이 버스 맨 앞 자리에 구겨진 채로 전화기를 붙들고 울고 있었다.

"오빠, 미안해. 나 왜 이러니 정말. 미안해. 나 술 많이 먹었어. 나 원래 폭탄주 안먹는데 오늘 막 섞어 마셨더니 취했나봐. 나 어쩌면 좋아 미안해 미안해"

 정말 구겨져 있었다. 의자가 아닌 바닥에 두 다리 쩍 펴고 앉아 가끔씩 욱욱 거리면서 갖은 주정을 다 부리고 있었는데 일행으로 보이는 또 다른 여성이 꿀물을 사와 먹이며 자꾸 "어째 어째" 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더라. 결국 버스가 출발할 쯔음 속을 뒤집었던 모든 것들을 게워내기 시작했는데 하필 투명 봉투가 옆에 있었고 나는 하필 바로 그 옆 뒷자리에 앉아있어서 쫙 찢어진 나의 시야에 딱하니 걸리고 말았다. 평소 뱃 속에 꼭꼭 숨겨 둬서 볼 수 없는 것들인데 영광으로 알아야 하는건지. 아, 이 말 하려고 쓴게 아니었다. 다시 잘라서.

 9시 퇴근 버스 맨 앞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한다. 커다란 앞 유리로 훤히 뚫린 앞을 보는 것도 답답하지 않아 좋다. 살짝 잠이 들더라도 먼저 내리는 직원들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내릴 곳을 지나치는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할 수도 있다.
 그날도 앞에 앉아 신문 펼쳐 놓고 음악 들으며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데 그 날 따라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물어보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이 버스 어디어디 가요?" 평소 9시 퇴근 버스를 잘 활용하지 않거나 다른 곳을 가야 될 경우에는 매 시간 노선이 다르기 때문에 미리 확인하지 않으면 당췌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버스 기사 아저씨의 대답이 멋졌다. "저도 모르는데요" "정말 몰라요" "저도 오늘 처음 운전하는거라..."
 결국 출발 2분여를 앞두고 입사 1년 반만에 당황스런 장면을 목격했다. 기사 아저씨는 버스 시트 사이에 있는 복도에 서서 슬쩍 앞 뒤로 이동하며 외쳤다.

"여러분, 제가 길을 모릅니다.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어디서 서야 하는지 모릅니다. 안산까지 가는 길만 압니다. 안산 들어서면 여러분들이 좀 알려주십쇼"
 옆 좌석에 앉은 내 또래의 직원과 눈을 마주치다 서로 웃었고 일전에 술에 취해 버스 바닥이 침대인냥 뒹굴거렸던 여직원과 그 옆에서 '난 상관없어요' 라는 표정과 말투로 챙겨주는 척 대충대충 싫은 티 팍팍 냈던 또 다른 여직원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

"아저씨, 이게 평일 노선이에요? 그럼 내가 알구요. 그럼 내가 가르쳐 줄게요. 이거 평일 노선이에요?"
이건 또 무슨 핸드폰 줄 뜯어먹는 소리인가. 9시 퇴근 버스는 수요일이 아니기에(수요일 막차는 8시) 당연히 평일 노선이고 주말에는 9시 퇴근 버스가 아예 없다. 그 말씀을 한 사람을 가만히 보니 약주 한잔 들이키신것 같은데 결국 내 옆자리에 앉더니 기사 아저씨를 안심시킨다.

"내가 알려줄게요"

70여대의 퇴근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옆자리 술 취한 아저씨는 몸을 앞으로 기대고 기사 아저씨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근데 기사님. 최소한 이 버스에 탄 승객들을 책임지는 분이라면 ... (아니, 다시하자) 근데에 기이사아님, 최소안 이 버수에 탄 승객드으을 책임졌으면은 노선은 응? 노선은 알아야지(누가봐도 취했다)"

기사님 왈 "그 얘기를 회사에다 좀 해주세요. 전 마북 연구소 담당이었는데 갑자기 오늘 이리로 가라는 걸 어쩝니까. 전 아무힘이 없어요. 대충 길을 물어 왔는데 안산 시내 들어가면 저도 잘 모를 것 같아서요"

"아니 그러니까, 최소한 준비는 하셨어야죠. 승객들은 말이죠... 솰라솰라"

 술 취한 아저씨의 충언이 작렬하기 시작했고 한 번도, 두 번도, 세 번도 아닌 7번 정도 같은 말을 한 것 같다. 마침내 기사 아저씨도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뭔 말을 하려니깐 "아아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하고 말을 끊더니 또 말을 하기 시작한다. 옆에 있던 내가 다 짜증나기 시작했는데 조금만 참으니 조용해 졌다. 평일 노선이라면 자기가 알고 있으니 길을 알려 주신다고 뒷 좌석에서 오신 이분은 앞자리까지 오셔서 '푸....' 거리시며 주무시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집에 일찍 가고 싶은 나와 옆 좌석의 내 또래 직원이 길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재밌는 건 평소 내리는 곳이 아닌 곳에서 옆좌석 직원은 "여기서 세워주세요" 라며 얘기했고 문이 열리자마자 번개처럼 뛰어 나갔다. 물론 그 직원 말고 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내릴 때가 다가오자 술에 취해서 버스 바닥을 구들장처럼 사용했던 여직원과 그 옆에서 웃는척, 열라 짜증냈던 또 다른 여직원들이 바톤을 이어 받은 눈치였다. 내가 내리려고 문 앞에 서자마자 그들은 "아저씨, 여기서 선 다음에 쭉 직진하시면 되요" 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그냥, 재밌었다. 점심 저녁 시간에 탁구를 치거나 축구를 하는 것 말고는 '재미' 라곤 전혀 찾을 수 없는 회사에서 그냥 그냥 흘러 넘길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고 체념하고 있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억지로 웃으며 보내 버리는 시간들에 익숙해 지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입사 1년 8개월, 통장에 돈은 두둑해 졌다만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에 속은 탄다. 평일에 버스를 타고 "이거 평일 노선이면 내가 알고. 이거 평일 노선 맞아요?" 라고 물었던 술 취한 아저씨를 떠올리면 괜시리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애들은 커가고 인사 평가로 인해 노란 봉투를 받는 과장급 이상 직원들의 나약한 지위와 험난한 근무 환경, 어쩔 수 없이 매달리며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고 욕 먹고 삭혀야 하는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
 
 안산 가는 길은 몰라도 상관없지만 앞으로 그려질 나의 길을 모른다는 것에 또 다시 슬퍼진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퇴근 뒤 본 김연아의 눈물에 "왜이리 안되보이고 불쌍하냐. 넌 너대로 사는 게 또 얼마나 힘들었니" 라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고 코 끝이 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