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렸을 적 나와 누나가 놀던 시간을 그냥 흘려 보내기 아까웠는지, 엄마는 테이프 수십개를 틀어 놓고 녹음을 하셨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토닥거리던 그 곳에는 아빠가 출근을 하시고 난 뒤 셋이 함께 했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얼토당토 않게 내가 누나에게 "너가 애냐" 라는 말을 던지는 부분도 녹음이 되었고(아마 누군가 사용했던 말을 따라했겠지) 엄마가 장난 친다고 꼴까닥, 하고 죽은 척을 하는 바람에 나와 누나가 안절부절 못하는 소리도(?) 녹음되어 있었다(10분 뒤 나와 누나는 누워있는 엄마를 뒤로 하고 까르르르 하며 놀았다지).
한 번은 퇴근 하는 아빠의 음성이 들리기도 했다. 여느 가족과 마찬가지로 나와 누나는 "아빠~~" 하며 앵기는 듯 했고 먹고 살기 힘든 탓에 하루 종일 피곤했던 아빠는 "에고고 에고고 그만해" 라며 슬쩍 우리를 옆으로 미셨다(소리만 녹음되어 있어 행동은 파악 안되지만 아무튼). 목소리에는 피곤과 고단함이 묻어 있었다.
어렸을 적 얘기를 들으면, 엄마의 옛날 가계부에 써 있던 한 줄 두 줄의 일기를 읽고 있으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 느낄 수가 있다. 하루는 아빠가 부엌으로 몰래 들어가시더니 소리 안나게 쌀독을 열어 보셨단다. 돈은 없는데 쌀도 없으면 어쩌나, 하는 모습을 뒤에서 본 엄마는 눈물을 삼키며 아빠 몰래 구슬을 끼우셨다. 월급을 받는 날이면 일단 애들부터 먹고 봐야 한다며 한 달치 이유식이며 우유, 간식거리를 잔뜩 사가지고 오셨다. 큰 장난감은 못 사주셨지만 당시 유명했던 영프레모빌(현재의 레고)을 낱개로 사주셨고 밑에 집 친구에게 팽이 싸움에서 지고 온 날, 내 손을 끌고 가 똑같은 팽이를 하나 사주셨다. 고무로 된 팽이였다.
우리 자식에게는 '가난' 을 물려 주지 않겠다던 아빠의 힘은 대단했다. 죽어도 엄마에게 구슬을 끼는 일을 시키지 않으시겠다며, 돈은 내가 벌겠다던 아빠의 자존심은 대단했다. 165cm의 키에 50kg가 살짝 넘는 작은 체구의 아빠는 끊임없이 '돈이 되는 장사' 를 찾으셨고 어렵게 어렵게 1988년, 지금으로 부터 22년 전에 안산으로 내려와 사업을 시작하셨다.
어려웠다. 사업 초기, 컨테이너 박스 하나 차려 놓고 시작했던 사업. 어렸을 적 가끔씩 들렀던 그 컨테이너 박스에서 나는 냄새가 기름내라는 것을 안지는 꽤 나중 일이었다. 기름에 떡이 져 꼬질꼬질한 쇼파에 앉아 뛰어 다녔고 가끔씩 공터에 나가 쓸데없이 철사줄을 펴 굴러 다니던 나무를 묶기도 했다. 아빠 회사에 가면, 할 게 없었다.
비바람이 치던 날, 바람에 날아갈 듯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아빠는 혼자 물건을 나르고 계셨다. 인건비를 아끼겠다고 함께 사무실에 계셨던 엄마가 도와주러 나가자 아빠는 소리치셨다. "들어가! 왜 나와 지금 밖에!" 엄마는 안절부절 못하며 컨테이너 안에서 작은 창 너머로 쓰러질듯 말듯 바지런히 움직히는 아빠를 그냥 바라만 보셨다. 당시 나와 누나가 그렸던 아빠의 그림은 검은 작업복이었다. 철이 없던건지 그 그림 밑에 나와 누나는 "매일 작업복만 입고 다니는 아빠, 양복 입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라는 글을 써 넣었고 그 그림은 집 앞에 있는 마트의 행사에 채택(?)되어 코팅이 된 채로 며칠 동안 걸려 있었다. 아빠에게서 나는 냄새가 기름 내라는 것도, 옷에 묻어 있던 얼룩이며 가는 팔목에 핏줄이 터질 정도로 튀어 나와 있던 것도, 그 때는 왜 그런지 알지 못했다.
먹고 살만해 졌다. 대신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은 적었다. 가끔 주말에 야구 글러브를 끼고 공을 주고 받기도 했다. 나이가 들고 나서 그렇게 한 두번 하는 것도 얼마나 힘들고 귀찮으셨을지, 그 때 알았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아빠의 목적은 그거였다. 먹고 살만해 지는 것, 나와 누나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는 것, 고생한 엄마를 호강 시켜 주는 것. 고등학교 1학년, 아빠는 나와 누나를 엄마 몰래 백화점에 데리고 갔다. "사고 싶은거 아무거나 골라" 벙찐 나와 누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서로 어색했을 뿐더러 접근하는 법도 알지 못했다. 나는 책 한권을, 누나는 CD를 골랐다. "엄마 몰래 사고 싶은거 다 사주려고 했더니 겨우 이거 고른거야?" 서운함이 비쳤다. 어찌 해야 할지 몰랐다.
대학을 못나오셨지만 수학 쪽으로는 참 똘똘하셨다. 중학교 때 까지 수학책을 들고 안방으로 가면 큰 꾸지람과 함께 답을 얻어 오곤 했다.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았던 집안 사정도 있었기에 자식들은 하고 싶은 공부 원없이 시켜주겠다던 마음도 있으셨다. 체구가 작다고, 학벌이 좋지 않다고, 돈이 없다고 무시 당했던 아픔을 고스란히 가슴에 묻고 너네들만큼은 나와 같은 삶을 살지 말아라, 하는 마음으로 일하셨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와 누나가 행여나 뒤쳐질까 꼬박꼬박 학원을 보내고 '수학이 딸리는 것 같다' 라는 말 한마디에 당시 고액 과외도 시켜 주셨다. 재수를 하겠다고 했더니 하라고 하셨다. 아직 친가 통틀어, 외가 통틀어서도 수도권 지역으로 대학을 간 사람이 없었다. 재수를 하고 고려대학교에서 합격했다고 연락이 왔던 날, 아빠는 엄마에게 말했다. "우리 아들, 효도 다했어 이제. 효도 안해도 돼" 수능을 망치고 한양대학교에 입학한 누나가 연신 1등을 하며 장학금을 받아 왔을 때도 아빠 특유의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며 등록금에 해당하는 돈을 누나 통장에 넣어 주셨다. "놀러 갔다와"
이런 아빠지만 못난 아들과의 트러블은 참으로 많았다. 사춘기였던지, 아님 뭐가 그리 불만이 많았는지 역시나 자식을 대하는데 서투른 아빠의 대화에 나는 단답형으로 대했고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엄마 아빠가 이해가 가지 않은 적도 많았다. 뭐가 잘났다고 정치 얘기를 하다가 싸운 적도 있었고 내 표정에 기분이 나빴던 아빠는 며칠 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대체 내가 뭐가 잘났다고.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왜 나는 그랬었는지, 왜 내가 아빠에게 입을 반쯤 벌린채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표정을 지었었는지, 지금 알고 있던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에 너무도 죄송스럽다.
'오늘은 집에 가서 아빠에게 술 한잔 하자고 해야지' 라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아빠를 대하면 괜한 어색함에 말을 못건낸 적도 많았고 가슴속에 담아뒀던 말을 아빠에게 건내는 상상을 하다가도 혼자 죽인적이 참 많았다. 서로의 접근의 문제겠지만 아들인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이 맞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작년 부터 아빠 회사에 문제가 터지기 시작하더니 참으로 다사다난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힘들어 하셨다. "아빠 힘내세요. 아빠를 믿어요" 라는 문자를 보내기도 했었는데 보낸 뒤에 '아차' 했다. 믿는 다는 말보다는 아빠의 어떤 선택도 저는 동의합니다, 라는 말이 더 힘을 드렸을 것 같았다. 몸도 안좋아 지셨다. 오른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셨고 얼마 전에는 갑자기 맹장이 터져 수술을 받으셨다.
엄마는 싫어하시지만 마루에서 tv를 보다가 잠드신 아빠의 얼굴 곳곳에는 삶의 고단함과 피곤함, 그리고 '늙음'이 깊게 베어 있었다. 쇼파 한 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체구를 갖고 아빠는 우리를 키우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엄마를 다독이셨다. 들어가서 주무세요, 라는 말을 하면서도 아빠 불 끌거에요, 라는 말을 하면서도 꼼짝 않으시는 소진 된 아빠의 체력은 '아빠' 라는 직책이 아니었다면 벌써 몇 번이고 드러 누우셨을 것만 같다. 아무 말 없이 몰래 취직하고 나타난 아들을 아빠는 또 좋아하셨다. 졸업하기도 전인 3학년 때 '장학생' 이라는 이름으로 번듯한 대기업에 입사 했으니 집안의 경사였다. 내심 나도 이제 아빠가 조금 쉬셔도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집에서 내게 들어가는 부담을 줄이면 아빠가 조금 편하게 일하실 수 있겠지 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나이 29먹고 또 다시 아빠 속을 썩이게 되었다. 그래도 아빠는 이해해 주셨다. 그래, 아빠가 다 서포트 해 줄게, 하고 싶은 일 해봐, 열심히 해 보고. 그렇게 속을 뒤집어 까 놓은 아들이었는데도, 이제는 조금 쉬실 때도 됐는데도 29 뒷바라지를 하시겠다고 했다. 죄송스러웠다.
집에 아무도 없다. 아빠는 병원에 계시고 엄마는 그 옆에 계신다. 오른 쪽 팔이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아 드디어 내일 수술을 받으시는데 간단한 수술인 줄 알았건만, 전신 마취에 무려 4시간이 넘게 걸리는 대수술이란다. 그럼에도 이 쪽팔린 아들은 아빠에게 직접 전화를 해 "몸 잘 살피세요" 라는 말은 못하고 엄마에게 전화해 안부를 물었다. '잘 되라고 기도하자' 라는 엄마의 문자를 받고 전화를 할까 하다가도 어색함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말았다. 못난 아들이다.
부디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다. 수술이 잘 끝나고 베시시한 얼굴로 병실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아빠가 퇴원하고 몸을 추스리시고 나면, 이 못난 아들도 용기 내어 아빠에게 한 마디 해야겠다. 아빠, 저 술 한잔 사주세요. 곱창, 좋아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