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여행

방바닥 2008. 5. 22. 18:41
 '여행' 이라는 단어에 조금 민감한 편이다. 친구들과 무리지어 마시고 토한다는 MT 나 여름에 맞추어 해변가로 우루루 몰려가 물장구치고 어떻게든 이성 한 번 꼬셔볼라고 기를 쓰는 행위에 과감히 나는 '여행' 이라는 단어를 덮어 씌우지 않는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을 여행이라고 한다지만 나름의 개똥철학에 입각, 내게 있어 여행이란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현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이라는 개뿔 거창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혼자 잘났다.
 여튼, 이런 내게 처음으로 의미있었던 여행은 2002년도 수능이 끝난 겨울이었다. 보길도라는 섬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무작정 버스타고 내려간 그곳에서 잘 곳이 없어 교회에 들어가 잠을 청하기도 했고 그곳에서 알게 된 친구들과 당구장에서 밤을 새 당구를 쳤으며 결국 섬에 들어가서는 하루 종일 잠에 빠져 있었다. 어떤 시인의 집에 머물면서 건너방에 있는 한 살 많은 세 명의 대학생 누님들과 어색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이른 아침 시인의 닥달(?)에 일어나 높디 높은 산의 정상에 발자국을 새기고 오기도 했다. 그 다음 날에는 밤새 가지고 간 노트에 내 생각의 정리를 옮겼고 무려 세시간 동안 걸어서 읽을 수 없는 한자가 새겨진 위험한 바위 근처까지 갔었다. 길다란 도로를 하염없이 걷다가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기도 했고 가족끼리 놀러온 여행객들과 사바사바, 얼큰한 찌개 점심을 얻어 먹기도 했다. 자갈이 넘치는 해변에서는 고등학교 선생님 부부를 만나 솰라솰라 이야기를 나누었고 고대에 합격했다는 나의 말에 '아이고, 우리 자식놈들은...' 의 자식푸념을 함께했다. 늑장을 부리다가 마지막 배편을 놓쳤고(거의 이럴때는 곁에 여자친구가 있어야 했지만 아쉽게도 나는 홀로...) 산속을 한참 걸어 민박을 잡고 저녁을 먹는데 후식으로 나온 뻥튀기 속에서 못이 발견되어 식겁한 기억도 있다. 멍청하게도 새벽 첫 차를 타고 가자는 생각에 5시에 일어나 산속을 걸어 내려오는데 추운 날씨임에도 컴컴한 산길에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랐고 겁을 조금 희석시키자는 의미에서 그 이른 시간에 친구한테 문자를 보냈는데 바로 답장이 오는 바람에 문자 소리에 오지게 놀라 머리칼이 쭈뼛 서기도 했다.
 그 여행이 특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홀로 돌아다니며 방해받지 않고 많은 생각들을 할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직도 그 때 했던 여러 사안(?)들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앞으로 펼쳐질 대학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같은 꼴같잖은 생각과 이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가, 나의 성격은 무엇일까, 나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일까, 남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와 같은 얼라 시절에 비하면 나름 심오한 문제들이었다.
 그 뒤로는 그닥 추천할 만한 여행을 해본적이 없는 것 같다. 만날 술 싸갖고 방에 싸질러 들어가 밤새 게임하며 주정을 했고 친구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 기억은 많지만 거진, 몽롱한 상태의 취성(?)이었다.
 오늘 1박 2일의 외로운 여행을 다시 기획했다. 딱히 여행이라기 보다는 홀로 밤기차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가 마지막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이건만 콩닥콩닥, 가슴이 설렌다. 많은 일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내게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할 터인데, 지금 걱정은 6시간 동안 퍼질러 잠만 자지는 않을지. 행여 기차 멀미는 하지 않을지. 구겨진 양복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정작 머리를 굴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내일 이맘때쯤이 되면 우울했던 요즘 기분에서 벗어나 한결 밝아진 원씨가 되어있었으면 좋겠다. 그만큼의 여러 해답 역시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