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씨

청계천 워킹

방바닥 2011. 4. 21. 22:15

#간만에 청계천을 따라 걸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이 북적거렸다. 날이 풀리긴 풀렸나보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볍다. 일교차가 크다기에 챙겨 입은 외투 속으로 땀방울이 흐를 정도로 열심히 걸었다. 화장실이 급했다-_- 퇴근길에 선배가 사준 딸바(딸기+바나나 주스)가 문제였다. 흘러가는 생각을 잡으려 해도 금방 부산해졌다. 가령, ‘오늘은 집에 가서 일단 씻고 책을 읽어야겠다. 카산드라의 거울을 너무 안 읽었네. 훌떡훌떡 넘겨보던 생활 속의 고분자라는 재미없는 책도 좀 집중해서 읽어야겠고. 절정 꽃미남 전정환한테 전화해서 군복을 빌려놓고 화장실로 뛰어 가야지. 아 나 지금 급하지. 젠장’ 뭐 이런 식-_-

#평화시장 근처를 지나는데 고등어 냄새가 코를 덮쳤다. 수백 마리를 한 번에 굽고 있는 듯 했다. 허기진 배 속에서 개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절한다고 적당히(!) 먹은 저녁이 벌써 소화된 듯 위가 허전했다. 그래서 그런가. 문득 공기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완연한 봄 날씨에 홀린 탓인지 겨드랑이털이 자라나면 청계천의 반대편 길로 뛰어도 파닥파닥 겨털 날개 짓으로 건널 수 있을 것만 같았다-_-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부유하는 것도 다 화장실이 급했기 때문이겠지-_-

#밤 11시 쯤 청계천을 따라 걷다 보면 가끔 오리-_-가 청계천을 거슬러 헤엄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면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다니기도 한다. 오리 근처를 지날 때는 오리 냄새가 났다. 이거 진짜다. 비릿한 오리 냄새가 난다. 오리가 없으면 청계천 냄새-_-만 난다. 어쨌든 오늘 공기는 뭔가 확실히 달랐다. 가끔 세슘과 요오드 냄새가 나는 것 빼고는-_- 2월에 느꼈던 청계천의 무겁던 공기가 사라졌다.

#요 근래 꽤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생각했다. 아, 지금 급하지 썅, 이거 말고. 조금 더 정상적인-_- 삶을 살아야겠다. 몇 년간 쓸데없이 방치하던 블로그도 자주 들어오고 하루 세끼도 잘 챙겨먹고 일도-_- 열심히 하고 건강 생각해서 술도 좀 줄이고. 시계도 좀 바꿔야겠고 집에 가서 봄옷도 챙겨 오고. 아, 아빠. 엄마가 머나먼 땅으로 춘무를 즐기러 가셔서 혼자 외롭게 밥을 챙겨 드시는 아빠 만나러 집에 반드시-_- 가야겠다. 안정되게, 조금 편안하게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