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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9(2)

방바닥 2025. 1. 30. 22:56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하는 바람에, 저녁을 먹지 못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이 싸우시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기억으로는 상당히 ‘세게’ 싸우셨던 것 같다. 결국 아버지는 집을 나가 그날 들어오지 않으셨고, 어머니는 저녁 일찍 안방으로 들어가 다음날 아침 10시가 넘을때까지 나오지 않으셨다.
누나는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저녁을 못 먹고 잠든 나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다가온 ‘허기짐’에 머리가 ‘핑’ 도는 경험을 했다. 한창 클 때였는지 발을 내딛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고, 결국 어머니가 깨지 않게 조용히 부엌에서 라면 끓일 물을 올려놨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어머니가 나오셔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은 채 밥상을 차려줬다. 괜히 밥을 먹으면서 울컥, 찡한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눈으로 흘러들었다. 입꼬리가 연신 아래로 쳐지는 것을 이겨내며 꾸역꾸역 밥을 삼켰다.

#.대학에 다니면서 용돈을 벌어썼다. 꼴 떨며 적금을 든다고, 과외비 50만원의 40%인 20만원을 매달 은행에 갖다 바쳤다. 월말이 되면 항상 돈이 부족했다. 교통비에 밥값, 간간히 들어가는 술값을 30만원으로 막기가 어려웠다. 술을 자주 먹은 탓도 있겠지만 이 돈으로는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여력도 되지 못했다. 1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애를 삼성역 베니건스 앞에서 만났는데(지금은 없어졌다) “우리 베니건스 가는거야?” 라는 그 애의 말을 씹으며 “설마”라고 답한 뒤 푸드코트로 향한적도 있었다. 베니건스에서 한 끼 먹으면 3~4일치 밥값이 사라지던 시절이었다.
같이 다니던 친구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결국, 과외비를 받는 날, 우리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날은 오늘 밖에 없어”라며 돈 걱정 하지 않고 항상 삼겹살이나 초밥 등을 닥치는 대로 입으로 쑤셔 넣었다.

#.기자를 하겠다며 한창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대학교 3학년 시절, 내게 먹는 것은 단지 배를 채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는 친구의 말에 “뭘 그리 먹는 것에 신경을쓰냐”며 핀잔을 주고 학관으로 향했다. 공기밥 600원. 반찬 2~3개만 넣으면 1500원에 한 끼 식사 해결이 가능했다. 맛 집을 찾아다니는 친구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세상은, 먹는 것 말고도 할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내 기억으로, 2006년 한해는 가장 적게 먹고, 가장 많은 책을 읽은 한해였다. 정신없이 살며 읽어대는 정보들이 내 뇌를 섹시하게 만들어 준다고만 여겼다.

#.연애를 경험하면서 맛 집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엔 서툴렀다. 맛 집을 대체 왜, 그냥 아무거나 먹으면 그만이지. 살이 찌기 시작했고, 동네방네 있는 맛 집 리스트가 하나 둘 저장됐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도 맛 집을 가야 하는 이유는, 여자 친구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 위해서였을 뿐, 스스로 찾은 적은 없었다. 배가 고프면 뭔가를 먹으면 됐다. 씹는 것이 귀찮아 후루룩, 콘푸레이크로 끼니를 대체한 적도 많았다.

#.이모부가 돌아가셨을 때, 병원 장례식장에서 이틀 밤을 샜다. 배가 고팠다. 슬슬 나이가 들면서 ‘밥힘(?)’이라는 것이 이해되던 시절이었다. 한 끼라도 밥을 먹으면 김치가 필요했고, 탄수화물이 가득한 쌀이 들어가지 않으면 언제나 허~했다. 장례식장에서 연이은 끼니를 챙겨먹었다. 밥 한술 뜨지 못하던 이모를 가족들이 강제로 끌고 와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며 밥을 먹였다. 이모는 울며 말했다. “내가, 지금 내가, 밥이 넘어가네. 그이가 죽었는데. 내가 밥이 넘어가.” 온 가족이 울음바다가 됐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먹는 다는 것, 참으로 애잔하다.

#.어머니와 같았던 큰외숙모가 병원에 입원해 다들 운명을 준비하던 그날 저녁. 20명의 가족들이 병실 아래 일층에서 김밥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또다시 애잔했다.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큰외숙모가 계신 병실, 바로 아래층에서 우리는 살기 위해, 배가 고프지 않기 위해, 혹은 힘내어 울기 위해, 김밥을 풀고 입에 쑤셔 넣었다.

#.회식자리. 정말로 싫은 회식자리에서, 선배와 나는 약속했다. “대충 먹고 빨리 가요 우리.”
맛 집이라는 그곳에서 상사들은 신이 나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고 죽을 똥 싸는 얼굴로 우리는 ‘이 자리가 편하지 않아요’라는 냄새를 계속해서 풍겨대고 있었다. 상사의 말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연신 카톡이 울렸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요?> <집에 가고 싶어요> <아 닭은 왜 이리 많이 나온거야> 닭을 맛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맛있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닭 한 조각을 입에 넣은 선배의 표정에서도 심상치 않은 표정이 감지됐다. 하나씩 집어 먹던 닭을, 어느새 헤치우고 있었다. 심지어, 난 그날 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술도 멀리하고 있었는데. 카톡으로 낄낄 대며 웃었다. <승질나네요. 그런데 닭은 왜 이리 맛있는 것까요> <너무 웃겨요. 집에 가고 싶은데, 닭이 너무 맛있어요>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취직을 아직 못한 후배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비싼 고기집을 예약했다. 하루 저녁, 맛나게 먹고, 힘을 내자며, 그날 고기를 먹으며 별 얘기 하지 않았다. 그냥 고기가 맛있었고, 서울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집이었고, 후배들 모두 정신없이 고기를 먹어치웠다. 그냥 뿌듯했다. 돈은 많이 나왔지만, 잘 먹고, 웃으며, 맛있다고 하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니 그냥 기분이 좋았다.

#.큰외숙모댁에 놀러가면 큰외숙모는 항상 내게 말했다. “뭐 해줄까? 닭도리탕 해줄까?” “식혜 있어. 먹고 가.”
무언가 함께 먹는다는 것의 의미. 나이가 들면서, 뛰고 나면 잔잔히 아파오는 무릎처럼, 조금씩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것 같다. “우리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 세상이 고달프고, 의지할 곳이 없을수록, 맛있는 것을 찾게 되는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함께 먹으며, 서로를 보고 웃는 것, 함께 공유하는 이 행위가 먹는 것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뭐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