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강의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유학생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석사에 진학하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연구가 아니라 행정업무와 잔심부름입니다.”
공대생들이 뿔났다. 대학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나무라고 기업은 학생들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비판한다. 언론은 외국 대학과 비교하며 우리나라 학생들이 공부를 안한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는 정작 공학교육의 수요자인 학생들의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다.
학생들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마침 기회가 닿아 한국공학한림원 산하 대학생 모임인 ‘차세대 이공대 리더(YEHS)’ 학생들과 2차례 토론회를 열었다. 10월 11일 부산에서, 11월 19일 서울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한 학생들의 입은 닫힐 줄 몰랐다. 저녁 9시에 부산에 도착한 기자는 10시부터 12시까지 이어지는 토론회에 지쳐 한 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술은 언제 먹나요...” 학생 30여 명은 끊임없이 불만을 토해냈다.
두 번째 토론회는 11월 19일 서울 과학기술센터에서 열렸다. 10여 명이 모여 영어강의, 공학인증제도, 강의평가, 대학원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듣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사회를 보는 친구가 서둘러 단 ‘3시간(!)’만에 끝내고 말았다. 끝나고 알았지만 여자친구가 기다리고 있대나 어쨌대나. 큭큭큭.
●외국 학생도 못 알아듣는 영어 강의
학생들은 영어 강의에 대한 문제점을 가장 먼저 꺼냈다. KAIST는 이미 전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고 있으며 포스텍은 대학원과 전공 3,4학년 수업에 영어강의를 적용했다.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들도 공대의 영어강의 비중을 점점 늘려가고 있다. 영어강의는 이제 대학에게는 필수가 됐다. 학생들은 “대학평가와 국제화를 이유로 영어 강의를 늘리고 있지만 학생은 물론 교수도 준비가 안 되어있다”고 꼬집었다.
지방 유명 대학 공대생은 “외국인 학생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 강의를 하는 교수가 있다”며 “학생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공부하겠는가”며 반문했다. 외국에서 살다와 ‘리스닝’에는 자신 있다는 공대생도 마찬가지였다. 준비없이 급하게 도입한 것이 화근이었다. 일부 대학에서는 영어강의를 위해 교수를 위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지만 이용하는 교수는 극히 드물다고 했다. 이처럼 준비가 안된 상황에서 학교는 “영어강의를 못 알아 듣는 것은 학생의 영어 실력이 부족한 탓”이라며 책임을 학생에게 전가한다.
서울 사립대 공대생은 “영어강의를 앞두고 학교가 학생을 위해 준비한 프로그램은 전혀 없다”며 “공대 수업을 이해하기 위해 영어학원을 다녀야 하냐”고 말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많은 학생들이 영어강의 시간에는 딴 짓을 하고 혼자 공부하는 경향이 높아졌단다. 공학적 소양이 영어실력으로 좌우된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한 학생은 “일본은 영어강의를 하지 않아도 노벨상 잘 받고 과학기술이 우리보다 앞선다”며 “우리말을 놔두고 왜 영어로 굳이 수업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도 했다. 국제화 시대를 위해 영어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학생들이 유학을 가거나 영어가 필요하면 알아서 공부하면 된다”며 “공학 수업은 ‘이해’가 중심인데 영어로 하면 이해가 잘 되겠나”고 비판했다.
●공학교육 선진화를 위한 ‘Abeek?’
공학교육 선진화를 위해 도입한 ‘공학교육인증제(Abeek)’에 대한 불만도 터져 나왔다. 이미 국내 대학 89개가 Abeek을 획득했으며 인증 받은 졸업자도 8000명을 넘어섰다. 도입하면서부터 말이 많았던 Abeek 도입을 위해 각 학교는 ‘참’ 많은 애를 썼다. 학생들이 말하는 ‘테크트리’ 도입을 위해서다. 공학인증을 선택하는 순간(현재 대부분의 대학은 입학하자마자 공학인증을 위한 수업을 받는다. 물론 인증받은 학교의 학생만) 학점 선택의 자유도는 없어져 버린다. 짜여진 수업을 군말없이 열심히 듣고 나면 졸업장에 ‘심화교육 이수자’가 찍힌다. 일부 대기업에서 취업시 가산점을 준다는 말에 학생들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이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왜 그럴까.
일단 공학교육인증이 도입된 학과는 ‘설계’라는 과목이 추가된다. 실험을 하고 문제점을 조원들끼리 토의하고 해결해 나가는 수업이다. 서울 사립대 공대생은 “기존의 실험 과목을 이름만 바꿔 진행한다”며 “도대체 왜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공학교육 인증은 ‘능력있는’ 공대생을 만든다, 라는 목표도 갖고 있다. 그래서 ‘경영학’, ‘인문학’, ‘글쓰기’ 등 다양한 분야의 수업이 개설됐다. 학생들은 역시 불만이었다. 서울 사립대의 또 다른 공대생은 “수업이 급하게 준비된 티가 많이 난다”며 “별 도움이 안 되서 다른 교양을 들어보고 싶지만 내가 신청할 수 있는 여유 학점이 없더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후배들이 “공학인증 해야되요?”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했다. “특정 기업 들어가고 싶으면 그냥 해. 근데 인증 안받아도 취업 잘만 하더라.” 결국 역량있는 공대생을 만들기 위한 공학인증이 취업을 위한 과정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공학인증 수업을 ‘평가’하는 과정도 있다. 매 학기가 끝나면 설문지를 돌리지만 그 내용이라는 것이 참으로 거대하다. ‘귀하는 이 과목을 수강함으로써 국제화 시대에 걸맞는 능력을 함양할 수 있었습니까?’ 이 질문은 기자가 대학생인 2008년도에도 열심히 썼던 건데 아직도 마찬가지란다. 학생들은 “평가지조차 현실적이지 않다”며 “총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석사 진학 후 맨 처음 배우는 것은 잔심부름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나 석박통합과정에 진학하는 대학원생들은 연구보다 먼저 잡다한 행정업무와 잔심부름을 배운다고 토로했다. 연구실 적응을 위해서는 각 연구실이 갖고 있는 독특한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다. 개인생활은 접어야 한다. 서울 사립대 석사에 재학중인 학생은 “군대 같은 연구실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다”며 “눈치를 보다가 선배에게 불려나가 혼나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방 유명대학 공대생 역시 “창의적인 연구? 일단 군대처럼 기고 봐야 한다”며 “연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눈치보기, 잔심부름, 행정업무, 심지어 연구제안서도 학생이 쓰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외국 대학의 석사생은 어떤지 물었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온 학생은 “미국은 석사에게 행정업무나 연구제안서를 맡기지 않는다”며 “연구와 공부에 매진할 수 있게 돕는다”고 말했다. 또 “연구만 해야 하기 때문에 연구에 대한 ‘로드’가 한국보다 크다”며 “우리나라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자잘한 사례들은 참 많았다. 연구실에 있는 지인도 많다보니 그들의 한탄을 매일 듣는다. 석사, 박사를 선택한 사람들의 학위 결정권자인 교수.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야 하는
교수들이 강의에 쏟아 붓는 열정은 얼마나 될까. 교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한 교수가 “강의평가 마음대로 써봐라, 내가 짤리나”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위험한 발언이지만 확인할 길이 없어 일단 서울 사립대 학생이 ‘말했다’고만 하고 넘어갈란다.
일단 ‘강의평가’라는 것이 유명무실해진 것은 맞다. 일부 대학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은 교수에게 상을 준다고 하지만 정년만 보장 받으면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반면 신임교수들은 연구며 강의며 모두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이 보인다”고도 했다.
경험담 추가. 1학년 오지게 놀고 열심히 공부하려는 마음을 먹었을 때, 학점을 잘 준다는 과목을 선택한 적이 있다. 과목 내용은 오지게 어려운, 교수는 아니었고 박사학위 딴 사람이 강의를 하는데 여기저기 학교를 돌아다니다 보니 원래 수업시간인 화요일, 목요일에 수업을 못한단다. 그리고는 토요일 오전 10시-_-에 몰아서 3시간을 한단다. 안산서 통학하는 내게는 치명적이었지만 그래도 어쩌랴, 학점을 따야 했으니. 썅, 4월 중간고사 전까지 딱 두 번 수업했다.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 열심히 학교 갔더니 “휴강”. 칠판에 써 있는 두 글자에 싸발 욕이 나왔다. 수업은 별로 안하고 프린트 나눠주더니 거기서 시험 다 나온단다. 문제는 절라 어렵다. 썅, 포기했다 그래서. 강의평가에 미친 듯이 안 좋은 말만 썼지만 다음 학기도 개설됐다.
●우리도 공부 많이 해요
언론에 자주 나오는 “우리나라 학생들 공부 안한다”라는 부분을 언급하자 미국 대학으로 단기유학을 다녀온 학생이 말했다. “미국에 있을 때 설문지 작성을 했는데 하루에 몇 시간 공부하는가를 물으며 ‘수업시간도 포함’이라고 되어 있었다”며 “우리는 수업시간이 빼지 않느냐. 그러다 보니 공부를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솔직히 기자도 대학 다닐 때 공부 많이 했다. 딴 짓을 많이 하느라 신경을 ‘조금’ 덜 썼지만 공대생들의 학기는 가히 죽음이다. 2학년이던 2003년, 서울 소재 유명 사립대인 고려대-_-에 재학중이던 기자는 4월부터 매주 이어지는 시험에 정신줄을 놨다. 벼락치기? 학교 다니면서 공대 수업을 벼락치기로 잘봤다, 라는 케이스는 본 적이 없다. 신기하게 학교 중간고사 기간만 시험이 없더라. 그래서 “중간고사 기간 오시면 보드 게임비가 무료!”라고 꼼수를 쓰고 있는 보드카페에 친구들과 매일 놀러갔다-_-
여튼, 다시 정상적인 얘기로 돌아와서, 단기유학을 다녀온 학생은(미국 유명대학이었다) “유학생을 만나면 우리나라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한다”며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참, 이 친구는 연구중심대학에 재학중인 학생이다. 또 다른 지방 연구중심대학에 다니는 박사과정 학생도 기자와의 통화에서 “며칠 밤새고 연구하고 공부하는데 공부 안한다고 하면 좀 억울하죠”라고 했다. 요즘엔 신입생들도 경쟁이 치열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서울 소재 국립대-_-를 졸업한 학생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어린 학생들의 투정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기자는 이 내용을 정리해 한국공학한림원에 제출했고 이는 다시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부회장(한양대 부총장)에게 전달됐다. 1일 오전, 기자와의 통화에서 권 부총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많은 말씀을 하셨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 맞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있구요. 개선해 나갈 점은 개선해야죠.” 권 부총장은 영어강의, 공학교육인증, 강의평가, 대학원 문화 등 분야별로 나눠 개선점과 어쩔 수 없는 부분 등을 이야기했다. “학생들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학교에 애정이 있어서입니다. 애정이 없으면 이런 말도 안했겠죠. 고쳐 나갈 수 있는 것, 개선해야 하는 점은 반영하겠습니다.”
학생들은 할 말이 참 많았다. 나라 지원이 잘 되고 있는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공부를 안하는 학생들도 아니다. 공부 정말 열심히 하는 학생들도 할 말은 많고 불만은 넘쳤다. 누구나 만족하는 상황을 찾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서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그 부분에서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http://news.donga.com/3/all/20111202/423040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