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를 논할 때 빼놓지 않고 쓰이는 인용문이다. 고전파 경제학의 기초를 정립했다는 평을 받은 '국부론'의 저자이기도 한 애덤 스미스. 그는 이 책을 통해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분업의 이점을 살릴 것,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유방임의 효과를 살릴 것, 그리고 자유무역을 통한 교역으로 이익을 증대시킬 것을 역설했다. 이런 그의 이론은 정부의 규제를 통한 경제 정책에 반기를 드는 많은 기업들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지는 성향이 있었다. 정부의 경제시장 개입 보다는 자유로운 경쟁을 중시하는 그들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근거 삼아 이익 증대를 꾀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역시 자유시장과 규제완화, 재산권을 중시하며 국가권력의 시장 개입은 경제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오히려 악화시킨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신자유주의를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 에서도 애덤을 철저한 시장주의자로 그리고 있다. "내가 아는 애덤 스미스는, 물질적 이익과 부를 성취하기 위한 욕심과 경쟁이 존재하는 자유시장 경제를 옹호하고 가르쳤던 사람이다" "그가 탐욕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했다고 배웠습니다. 이기적인 행동이 사회를 더 살기 좋게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것도요. 설령 그 행동의 의도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애덤스미스 경제학 협회 회장인 라티머 교수 역시 ”안정화, 민영화, 자유화“를 외치는 철저한 시장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로 돌아온 애덤은 ”나의 이론을 이해 못하는 것이 나의 잘못인가“ 라며 반문한다. 여기서 그의 숨겨진 역작 ”도덕 감정론“이 소개되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 보다 도덕 감정론에 가치를 둔다는 사실은 동시대인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덕 감정론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도덕 감정론은 스미스 연구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국부론은 그에 따른 세부사항을 다룬 책이라 한다. 즉 국부론을 보기에 앞서 도덕 감정론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필연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로 컴백한 애덤 스미스는 번스에게 말한다. “부의 증대는 바람직하지만 좀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마음의 평화, 평온한 존재감이 바로 행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탐욕은 바람직하며 그런 이기적 행동이 사회를 더 살기 좋게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그의 이론을, 비록 그 행동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효과적으로 증진된다던 그의 이론을 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그가 설정해 놓은 이론의 배경인 철학적 사상을 기만한 무책임한 발언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말한다. “국가의 부가 증진하려면 부자와 가난한 이들을 똑같이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먼저 정의 구현이 가능한 체제를 수립하고 공동 시설과 교육 등 높은 수익이 발생하지 않지만 전체 사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할 수 있는 분야에 투자한다” 고 말이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자유를 보장하라”고 말이다. 시장경제에 적절한 규제와 제한이 가해져야 하는 이유로 그는 시장주의의 붕괴를 말한다. “경제 활동에 도덕성이 없으면 경제적 자유는 유지될 수 없다”고 말이다.
즉 그가 주장했던 자유주의, 방임주의란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을 의미했던 것이다. 하지만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의 말마따나 “앞 뒤 말 싹 빼 버리고” 몇 구문만을 인용한 채 그의 사상, 철학, 이론을 호도하고 있다. 자유방임, 자유경쟁을 주장했던 그가 도덕성에 기초한 정부의 적절한 규제도 주장했다는 사실. 역설로 넘기기에는 우리가 너무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얼마 전 영국중앙은행은 애덤 스미스의 초상을 입힌 20파운드 지폐를 선보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애덤 스미스는 아수라 백작처럼 얼굴의 전체를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마치 사람들이 자신의 반쪽만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무언의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세계는 점점 신자유주의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강대국의 번영 속에 후진국은 맥을 못 추고 사회 간 양극화뿐 아니라 국가 간 양극화 역시 그 간극이 점점 커지고 있다. 무한한 자유가 공평한 경쟁을 갖고 오지 않는다던 그의 말을 새삼 떠올려 본다. 도덕감정론을 배제한 국부론의 해석을 보며 애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