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지하철 사랑

방바닥 2007. 8. 6. 16:21
 재수생활을 포함해 근 6년을 서울에서 지내다 보니 이제는 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접어 든 덩치 큰 친구 한 놈이 있으니 바로 지하철이다. 안산이라는 조그마한 도시에서 살 때는 오로지 믿을 놈은 두 발 뿐이었고 실제로도 나의 활동 반경은 걸어서 30분 이내로 굉장히 협소했기 때문에 학교를 가거나 고등학교 유일의 낙이었던 축구를 하러 다닐 때 말고는 버스나 지하철은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서울로 넘어오고 나니 상황이 달라졌다. 어디서 모이자, 어디서 만나자, 학원은 어디라더라, 어디서 만날까, 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하철 역을 가늠하며 시간을 계산해야 했고 환승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게이트는 어디인지, 어떤 역에서 사람이 많이 내리고 자리가 많이 나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하나 둘 쌓이기 시작했다. 복잡한 서울 시내에서 내게 가장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은, 바로 지하철이었다.
 우선 버스와 달리 교통 상황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이 나를 유혹한다. '시간 약속은 절대적' 이라는 나의 개똥철학에 가장 부합하는 교통 수단은 시간 대 별로 촘촘하게, 그리고 밀리지 않게 출발하고 도착하는 지하철이 유일하다. 버스의 경우 서울시내의 교통 상황에 따라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에 너무 빨리 도착하거나 혹은 늦게 도착할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차멀미 역시 나를 지하철로 이끄는 원인 중 하나. 지하철에 앉아 책이나 신문을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버스에 앉아 활자를 읽기 시작하면 금새 머리가 빙빙 돌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결국 mp3에 몸을 맡긴 채 먼 창 밖을 바라보며 안정을 취해보지만 그럴 때 마다 느끼는 시간의 아까움이 사뭇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하철이 끌리는 이유는 바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연히 들리게 되는 옆 사람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사는 이야기, 꽉꽉 막힌 출퇴근 지옥철에서 맡게 되는 시큼한 사람들의 냄새와 밀리고 찡기며(?) 느끼는 그들의 살갗, 재밌는 억양으로 물건을 팔지만 속은 쓰릴 지 모르는 잡상인들과 제사는 구시대의 유물이라며 예수 믿고 천국 가자는 열혈 신도들과의 조우, 한 두 잔 걸친 사람들이 풍기는 술내음과 마주보고 앉은 사람과의 어색한 눈마주침.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의도하지 않게 태어나 한 평생 억지로라도 살게 되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과 절망, 기쁨과 슬픔등을 느끼는 그 기분이, 나는 너무도 좋다. 비록 고장으로 역과 역 사이의 선로에서 내려 컴컴한 통로를 투덜대며 걸어나온 적도 있고 앞에 앉아 있던 술 취하신 분이 나의 신발에 거하게 토를 한 적도 있으며 미친듯이 잠을 자다가 옆의 여성에게 심하게 어깨를 밀린 적도 있었다. 또한 역시나 죽은 듯이 자다가 불이 모두 꺼진 컴컴한 지하철에서 역무원 아저씨의 짜증섞인 목소리에 잠을 깬 적도 있고 내릴 역을 지나쳐 자신에게 수없이 욕을 해가며 걸어나온 적도 부지기수. 지하철 싸움도 많이 구경했고 현재 대선에 나와있는 아무개아저씨의 이 전 선거때 지하철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앉아 있던 사람을 일으켜 세워 포즈를 잡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덜컹 거리는 지하철의 움직임에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앉아 있던 내 또래 여성분의 무릎에 내 엉덩이를 살포시 포갠 일 등, 이러저러한  소소한 일상에서 '삶' 이란 것을 느끼고 있으니, 이렇게 되면 내가 변태인가 아니면 오버스러운 사상일까.
 어찌되었든, 이런 이유로 나는 지하철이 좋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좋으나 마나 함께 할 나의 발이기도 하니 이렇게 좋아진 것이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창신역에 들러 일을 마치고 다시 안암역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혜화역에 들러야 하고 사당에서 2호선을 갈아타고 신림으로 가야 할 듯 하다.
 오, 나의 지하철. 오늘도 내일도 나의 멋드러진 발이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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