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드라마 vs 현실

방바닥 2010. 3. 16. 01:00

 퇴근 버스를 운전하시는 기사 분들 중에 싫어하는 분이 한 분 있다. 대략 3~4주를 주기로 돌고 도는 것 같은데 이번주 "안산3" 행 9시 기사 아저씨가 바로 그 분이다. 좀 일찍 올라타 책이라도 보면서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으면 독서등을 꺼버리는 바람에 열혈 독서광인냥 핸드폰 불빛에 의존해 책을 읽곤 하는데 불 좀 켜달라니깐 "차가 좀 쉬어야 되요" 하면서 안된단다. 7시 40분 퇴근 버스 기사 아저씨는 아예 활짝 켜놓을 뿐만 아니라 이 분 말고 다른 9시 퇴근 버스 기사 아저씨들 역시 독서등은 항상 켜 놓는다. 혹시 꺼져 있어서 미소와 함께 나근나근한 목소리로 부탁을 하면 역시 웃으며 화답해 주는데 이 분은 나의 나근나근한 미소에 '웃기고 있네' 라는 표정으로 답을 한다. 뭔가 다르다.
 한 번은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내게 발을 조심하란다. 깜짝 놀라 꼬고 있던 발을 얼른 풀렀는데 옆을 보니 정수기 물통이 하나 놓여 있었다. "먹는 물이에요" 라는 냉정한 말에 "네" 하면서 혹시나 내 발이 닿아 있었나 라는 생각을 하며 자연스럽게 다리를 또 꼬았는데 운전하다 말고 "정수기 통 있다구요. 먹는 물이요" 라면서 짜증나게 말을 또 건냈다. 그 분의 말투에서는 순간 자신은 엄청 똑똑하고 논리적이고 왜 그러면 안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나이도 어려 보이는 새끼가 왜 그리 말을 쳐 안듣냐, 내가 운전기사라고 무시하는 거냐, 라는 느낌이 스펀지 물 빨아 들이듯이 내 귓속으로 스며 들었다. 덩달아 심기가 불편해져 "다리 안닿았다고요" 라며 똑같은 말투로 응수해 주었다. 그렇게 소중한 물이라면 왜 땅바닥에다 쳐 박아 두는지 한 번 더 물으려다가 정수기 통을 내 머리위로 던져 버릴 것 같아 참았다.
 내릴 곳이 되어 직원 몇 분이 슬슬 앞으로 나와 있으면 "나와 계시지 마세요. 앞까지 나와 계시지 마세요" 라면서 손으로 제지까지 한다. 다른 승객 분들이야 이 분과의 갈등 구조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에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 갔을테지만 매일 앞에 앉아 첨예한 대립 관계를 이뤘던 내게는 그 말 한마디도 참 재수없게 느껴졌다. 다른 기사 아저씨들은 아무 신경 안쓰는 일에 대해 유독 말이 많은 이 분, 사람이 참 다양하다지만 뭐가 그리 '꿍' 한지.
 결국 내가 선택한 복수는 인사 안하고 내리기다. 항상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왠지 이 기사 아저씨한테는 인사를 하고픈 마음이 싹 사라진다. 오늘은 대형 티비가 있는 버스 였는데 소리도 다 줄여 놓은 채 내내 켜놓더라. 하나가 미우면 열가지가 다 밉다고 감은 눈에 연신 번쩍 번쩍 반짝 반짝 자극하는 티비 속 빛의 변화에 잠도 오지 않았다. 역시나, 오늘도 열혈 독서광이 되어 핸드폰 불빛에 책을 읽었다. 누가 보면 한달에 100권씩 읽는 인간인 줄 알겠다.

 제길. 말이 또 길어졌네. 티비 화면의 변화에 잠도 안오고 뭔 드라마를 틀어 놨는데 붕어처럼 입만 뻥긋뻥긋 거리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처음엔 화딱지가 나다가 다음엔 드라마 속 출연진들을 살피기 시작했고 내릴 때 쯔음엔 드라마의 '구조(?)' 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드라마를 바라보는 우리는 출연진 A와 B의 관계에 대해서, 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오해가 생겼는지, 왜 이런 생각들을 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때문에 아쉬워 하고 안타까워 하며 때론 분노한다. 쳐죽일 놈, 나쁜 놈, 불쌍한 것, 사랑스러운 것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드라마의 몰입이 쉬운지도 모르겠다. 아, 내가 저 사람이라면, 이런 오해들, 이런 생각들,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 얼마나 행복하고 또 즐거울까, 혹은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볼까 라는 착각 속에 나를 그 사람과 동일시 시키며 만족을 얻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말도 안되는 각본들은 이런 생각들이 얼마나 실속 없는지 역시 보여준다. 우리의 눈은 약 180도 정도의 시야 확보를 할 수 있는데 반해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바로 옆에서 누군가 어떤 행위의 장면을 훔쳐 보고 있어도 절대 모르더라. 문을 빼꼼히 열고 일어나는 일을 몰래 보며 서로의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풀리기도 하는 장면은 이제 너무 식상하다. 회사를 다니다 보니 회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드라마에 열광한다. 현실에선 할 수 없는 일들이,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관계들이, 현실에선 알 수 없는 여러 사람 간의 감정 간 얽힘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말이 길었다. 드라마를 보며 말도 안되는 생각을 이어 가다가 오늘 회사에서 있던 일들과 오버랩 되었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사보 기자 허가를 받았고 팀장의 허락만 떨어지면 협조전과 함께 바로 기자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한 달에 두 번 나가는 기사고(안나가는 때도 있다)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기회를 주신 다른 팀 대리님의 인수 인계 격으로 함께 하는 것이기에 부담도 없다고 생각했다. 과장님과 차장님께 허락을 받고 팀장님께 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그 때 까지 전혀 반대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허락을 받아 기사를 쓸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팀장님은 "팀의 맨아워(man hour)를 까먹는 일에는 신중해야 한다" 며 부정적이었고 기사는 퇴근 뒤에 쓴다, 라는 말에 "그 시간에도 일해라" 라는 말로, 주말에 쓰겠다는 말에도 "일 할 생각을 해라" 라는 말로 버티셨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나와 팀장님간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딱히 부정적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도 없었다. 인사 평가도 그럭저럭 무난했고 회식 자리에서 칭찬 처럼 하는 말에 웃으며 기꺼이 허락할 줄만 알았건만 상황 파악이 아예 잘못된 상태였다. 심지어 팀장님은, 기분이 무척 나쁠 때만 나타난다던 미간 찡그리기를 보이기 시작했고 나의 퇴근 뒤에, 주말에 쓰겠다, 라는 말이 말대꾸처럼 들리셨는지 "일도 제대로 안하... 일을 제대로 할 생각을 하란 말이야. 너 전공도 아니면서 그런걸 왜 하려고 해. 일을 할 생각을 먼저 해야지 일을 안하고 왜 다른 일 할 생각을 하는거야" 라고까지 말씀하셨다. 일도 제대로 안한다, 라는 말을 내뱉으려다 후딱 이성을 되찾고 말을 바꾼 흔적이 역력했다. 내가 일을 제대로 안하고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이 상황이 드라마였다면, 시청자는 내가 팀장님께 말씀 드리러 가는 장면에서 "에휴, 혼나겠네" 라던가 "쟤는 팀장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나봐" 하면서 조만간 나타날 갈등 구조를 예상했을 것이다. 또한 나의 평소 행동이 팀장에게 어떻게 비췄는지를 바라보며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와 같은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드라마를 바라보며 감정 이입을 하는 것도 실속이 없지만 현실을 살면서 내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 역시 참 실속 없는 짓이었다. 세상은, 나만 사는게 아니니깐. 회사를 참 쉽게 생각한 못난 것. 또 하나 배운 것인가.

 담배 한 대 태우고 이를 닦으니 잇몸 염증이 또 꽈리를 틀고 머리를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난 번에는 치료 받고 나서 꽤 오랜 뒤에 생기더니 이번엔 단 며칠만에 나타나다니.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나트륨, 비타민 부족이라는 말에 "실험실에 있는 나트륨 갈아서 마시면 되죠?" 라는 썰렁한 농담으로 휴식 시간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일도 제대로 안하는 원씨는 일하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 산학과제 회의 자료 검토가 들어왔고 집중이 안되 내일 오전까지 보내주겠다며 슬쩍 뒤로 밀었다. 나, 일 제대로 안하는거 맞구나.

 힘들었을 때, 대학 다닐 때는 날 생각해 주는 친구들이 참 많았다. 자기 일에 바쁘기 보다는 옆에 있는 친구를 먼저 생각해 주는 듯한 모습에 "타인은,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 라는 말에 수긍하면서도 한 켠으론 걱정을 받으며 힘을 내곤 했는데 모두가 자기 앞가림 하기 바쁜 이 공간에서 나의 '힘듦' 은 투정일 뿐이다. 연대 나와서 삼성전자 들어가 매일 3교대 하며 "나 연대 나왔거든!" 이라는 말과 함께 챔버를 닦다가 결국 결혼해 열심히 3교대 하고 계신다는 회사 선배 친구의 일화가 생각난다. 이렇게 살다가 결혼하고 회사에 매달리며 사는 것이 인생일까. 아직 젊은건지, 어린 건지, 아님 생각이 모자른건지, 좋은 직장, 많은 연봉에 배가 쳐 불러 생각해 보면,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
 예고편도 없는 현실에서 내일을 기대하며 눈을 감는 날이 언제쯤 올 수 있을까. 내일의 현실은 딱 보니까 너무 즐겁고 밝네, 라는 기분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발버둥 쳐 봐도 내가 속한 현실을 벗어나기는 참 어렵다는 것이 바로 이곳 인생일텐데. 아, 이런 말 하기 정말 싫고 쪽팔린데, 먹고 살기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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