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잘랐다. 어디서곤 머리를 자르고 나면 언제나 들리는 소리 "착해졌어요". 정확한 의미와 의도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회사에 입사한 뒤부터 '단정' 하게, '아저씨' 라는 소리를 들어도 부담없을 만큼의 나이도 됐으니 대충 이름에 걸맞는(호섭!) 스타일을 뿜고 다녔나 보다.
10여년을 넘게 다닌 집 앞 쌈지 헤어아트의 원장님께 정말 죄송하지만 약 6개월 전부터 미용실을 옮겼다. 집을 이사한 뒤로는 거리도 약간 생겼을 뿐만 아니라 펄럭대는 귀에 '이제 그런데서 자를 나이 됐어' 라는 말 한마디가 쑤욱 들어와 버리더니 어느 순간 '박준 헤어아트' 의 마일리지를 차곡차곡 쌓는 착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닥 훌륭한 외모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 헤어 스타일에 따라 전체적인 외양이 단방에 바뀌곤 했는데 가격을 두배로 내서 그런지, 괜시리 머리를 자른 뒤 거울에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나의 실루엣이 살짝 마음에 들기도 한다(응?). 플라시보 효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쭈뼛쭈뼛" 의자가 5개 정도 있는 동네 미용실에서 원장님, 아르바이트생들과 노가리를 데쳐 먹으며 가끔 아이스크림도 사들고 친분을 과시하던 아기자기한 곳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넓다란 아트샵 크기와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과도한 친절(가방 들어주기와 같은)이 이어지는 곳에서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연신 "쭈뼛" 거리며 엉거주춤 자세로 실눈 크게 뜨고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찾으시는 선생님 계세요?" 라는 소리가 들려 온다. 호텔 체크인 하는 곳 처럼 카운터(?)가 입구 오른편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화장을 짙게 한 눈 큰 아줌마 한 분이 마치 식장에라도 다녀온 냥 곱게 차려 입고 방긋 미소를 건낸다. "처..처음인데요" "그럼 잠시만요" 곧 큰 눈이 빠져 나올 것 처럼 두리번 거리더니만 "이 분 가방 받고 김선생님께 모셔다 드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가 온 똑같은 옷차림의 알바생 중 한 명이 가방을 뺏어 가더니 목욕탕 사물함(?) 같은 곳에 가방을 넣고 열쇠를 건낸다.
내 머리를 책임져 줄 분은 웨이브 진 머리에 통통함을 내세운 김선생님이었다(디자이너 김 이라고 해야 하나). 무뚝뚝한 표정에 귀를 자르고 나서도 "아 미안해요" 라고 딱 한마디 할 것 같은 냉정한 가위질이 일품이었던 김선생님은 머리를 자르는 20여분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섬뜩한 가위질을 멈추며 "괜찮으세요" 라고 묻는다. 표정이 없다. 거울속의 나를 대충 확인했다. 안괜찮다고 하면 가위를 들고 연신 찌르며 미안하다고 할 것 같아 "네" 라고 대답했더니 "샴푸 해 드려" 라는 역시나 짧은 한 마디. 여성임에도 울려퍼지는 낮은 저음덕분인지 앙칼지게 울려퍼지는 "저 따라 오세요" 라는 알바생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더욱 찰지게(?) 들린다.
15000원을 결제했다. 난생 처음 머리 cut 에 투자한 10000원 이상의 돈. 마음에 들었어야만 했다. 마일리지 카드를 받으며 대리석과 같은 벽에 살짝 반사되는 스타일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오래 보면 안된다). 김선생님이라... 명함을 지갑 속에 넣으며 문을 나서는데 냉정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김선생님과 문 앞에서 마주쳤다. 서서 보니 덩치도 상당했다. "안녕히 가세요" 덩달아 엉겁결에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는데 옆을 지나기도 전에 쌩, 하는 바람과 함께 돌아서 버린다. 내가 잘못한게 있나 보다, 라는 생각에 처음 이곳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나의 행적을 반추해 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뒤져봐도 잘못한 것이 없다. 카리스마는 있지만 머리 두 번 더 자르면 온 몸의 털이 쭈뼛 서서 옷 밖으로 다 튀어나오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문을 나섰다. 엘레베이터에서 다시 확인한 머리는 그냥 착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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