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봉급쟁이 삶

방바닥 2008. 9. 23. 23:03

 있는 눈치 없는 눈치 다 따지며 7시 20분이 되면 슬그머니 가방을 싸고 그룹장이신 차장님께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뻘쭘하고 초점 잃은 눈망울을 남기며 후딱 돌아섰다. 우리 그룹 4명 중 3명이 남아 있었고 그 밖에 퇴근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인지 나오는 뒤통수가 괜시리 화끈거렸다. 선배사원들의 말에 따르면 아직 "본업무"가 없기 때문에 5시에 가도 괜찮다, 고 하지만 워낙에 소심한 인간인지라, 그리고 그럴만한 배짱도 없는 인간인지라 '그랬으면 좋겠다' 라는 상상 한 번으로 만족한다.
 7시 40분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 8시 30분쯤 도착한다. 씻고 포도 한 송이 먹고 괜히 신청한 사이버 어학교육을 한 챕터 듣고 못 본 신문을 뒤적이다 보면 금방 11시가 되고(지금처럼) 올블로그에 들어가 이 글 저 글 읽고 나면 금새 12시가 가까워진다. 아, 결국 오늘도 책을 못읽었네, 라며 침대에 눕기 무섭게 잠이 들고 눈을 뜨면 6시.
 지금이야 괜찮지만 과장님의 말씀대로 "이제 인원도 찼으니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면 내게도 업무가 주어질 것이고 수요일을 제외한 월화목금은 9시 퇴근이(금요일은 도망치자) 불보듯 뻔하다. 어쩌면, 올 해부터 시작될지도 모를 일이고. 9시 퇴근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10시. 씻고 나오면 10시 30분, 12시에는 잠을 청해야 하니 내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 30분이 전부일텐데 이 알토란 같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조금 더 나은, 인간다운, 그리고 발전하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와 거창해보인다).
 그러고 보니, 행여 결혼을 한 뒤, 과장을 달고 나면 수요일도 없고 토요일도 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데 나의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럼 일주일 통틀어 얼마나 되는 걸까. 20여년동안 뭐하고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던 한 차장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 아주 조금, 뜨거운 물에 닿을랑 말랑 거리는 손가락에 느껴지는 열기처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출퇴근 시간에 벙찐 상태로 창밖을 내다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PMP를 하나 구입해야겠다. 어학 강의를 듣던, 다큐멘터리를 보던, 어떤 강의를 듣던 간에 오고가고 두시간을 나를 위해 만들어가야 겠다. 잠자는 시간도 줄여야겠고.
 문득 중학교때 2년 연속 담임이었던 차광국 선생님의 명언이 떠오른다. "야, 너네 공부 잘 해봤자 아무 소용없어. 그래봤자 봉급쟁이밖에 더하냐!?" 물론 내가 공부를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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