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피묻은 명세표

방바닥 2008. 8. 31. 22:39
 간만에 석웅이를 만났다. 만날 바쁘다고 빼던 놈이라 그런지 더욱 반가웠고 그랬기 때문에 소주 한 잔 한 잔이 달콤했다. 그간 얻어먹은 것도 많았고 월급도 받았으니 내가 쏘마, 라는 말로 즐겁게 넘기다가 직장인이 되면 꼭 해보고 싶었던 바에서 양주 먹기를 하러 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생일 때 마다 9900원 짜리 피자 먹으러 가던 우리가 양주를 먹을 정도가 되었구나, 라며 이런 저런 추억과 께 양주를 비웠는데...
 여기서 끝이어야 했다. "한 잔만 더하러 갈까?" 라는 말에 덩실덩실 또 다시 술집을 찾아 해맸고 결국 내 기억은 거기까지 였다. 눈을 뜨니 이상한 모텔에 누워있었고 석웅이는 사라졌고 내 손에는 피 묻은 카드 명세표가 쥐어져 있었다. 이게 얼마야... 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마 한 구석에 있는 시퍼런 멍은 무엇일까. 이곳저곳에 묻어 있는 이 '피'는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다행히 이마에 멍 말고는 별다른 상처가 없는 것 같은데 이게 뭔 일일까 대체. 그리고, 내가 걸치고 있는 짙은색 외투는 누구의 것일까...
 하루 종일 쓰린 속을 움켜쥐며 한 없는 반성을 이어갔다. 이렇게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나는 어떤 일을 당했을지, 나쁜 마음만 먹는다면 내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저항 한번 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였을 텐데.
 엄마에게 싹싹 빌었다. 당분간 외출을 자제하고 술도 자제하는 방향으로 삶을 꾸려나가야겠다. 무서운 이 사회. 경험으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이자 큰 약점 중의 하나다. 그리고 정말 무서운 것은, 바로 카드. 잘라버리던가 해야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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