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21세기 '도'

방바닥 2010. 8. 19. 00:17

영어 학원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한 시간 동안 계속 된 영어와의 교감으로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영어로 바꿔 가며 강남역 사람들을 헤집고 있었다. 버스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고민하던 중 갑자기 한 남자와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네"
"저희가 신한%#$% 사람들인데요. 짧은 동영상 보시고 감상평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어디라구요?"
"신한%&^$%^ 요"

자세히 못들었는데 또 물어보기가 괜시리 미안해 그냥 넘어갔다. 순간 신한증권에서 마우스질로 열나게 주식을 사고 팔고 있는 재신이의 얼굴이 떠올랐고(재신아, 이런 표현써서 미얀-_-) 뭔가 노트북을 들이 밀며 부탁을 하는 모습에 신입사원 연수 중이거나 아니면 회사 사람들이 프로젝트 , 혹은 회사 내 이벤트 관련해서 일을 하고 있는거라 생각했다. 기꺼이 응했다.

"네"
"자, 이거 한번 보세요. 근데 교회 다니시나요?"
"아니요"
"아 네, 천국과 지옥은 믿으시나요?"
"아니요"
"아 네, 천국 가고 싶으세요 지옥 가고 싶으세요?"
"천국이요"
"아 네, 성경 가지고 계세요?"
"아니요"
"아 네, 그럼 이거 한 번 보세요"

말 참 많다고 느낄 때 쯤 교회, 천국 운운하는 것이 살짝 의심스러웠는데 빙고였다. 그와 그녀가 보여준 작은 노트북 속 영상은 성경의 말을 짜집기한 자막과 어떤 영화에서 다운 받았는지 불 속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짜집기 한 듯한 신체의 부위가 잘린 군인들의 모습이었다. 윈도우 메이커 이용하면 나도 이 정도는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천국을 가야 한다는 말을 미친듯이 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이해 안가는 것은 "공기도 안 보이지만 존재하잖아요. 천국과 지옥도 안보이지만 존재합니다" 비유로 들은 공기가 눈에 안보이는 것과 천국과 지옥이 눈에 안보이는 것 사이의 논리적 연결 관계가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볼에 솟아난  빨간 종기가 터질 것만 같아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결론은 지금 나와 함께 가서 기도를 받고 천국을 가자는 것이었다. 잠깐의 시간이면 된단다. 미소가 가신 얼굴로 가만히 빨간 종기를 쳐다 보다가 "천국 나중에 갈게요. 제가 지금 바빠서 천국에 들를 시간이 없어요" 하고 지하도로 내려왔다.

가히 21세기 정보화 시대다. 이제는 성경책 하나 들고 길다란 십자가를 등에 맨 채로 사람들을 꼬시지 않는다. 노트북을 이용해 UCC 영상을 들먹이며 '설문조사' 차원에서 꼬시려 한다. 자뭇 화려해 보이는 영상이지만 좀비 영화와 전쟁 영화, 즉 피터지고 몸 잘리고 불에 타고 이런거 좋아하는 영화 매니아인 나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짜집기 하려면 좀 제대로 하지. 진짜 존재한다는 지옥의 영상을 담아 오던가.

암튼, 재밌는 세상이다. 빨간 종기의 남자와 얼굴이 좀 커보였던 여자분의 시급은 대체 얼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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